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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불국사(佛國寺)

역사학/국내여행

by 가을향기쉼터 2022. 8. 3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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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 창건

5천년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 고금 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서기 528(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迎帝夫人)의(迎帝夫人)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只召夫人)이(只召夫人)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 부처님(毘盧遮那佛)과(毘盧遮那佛) 아미타 부처님(阿彌陀佛)을(阿彌陀佛) 주조해 봉안했고, 670(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751년 당시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 두 번째 중창이 시작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5 <대성효 2세 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 무설전(無說殿) 32,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2,000)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다보탑(국보 제20호)(국보제20호)

다보탑과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1)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29m, 10.75m로 비슷하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 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 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 위에(基壇) 세운 3층 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 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 8,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가 남아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석가탑(국보 제21)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 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 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석가탑(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각 10.75m, 10.29m로 비슷하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떠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추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9월에는 안타깝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7)의 머리장식을 본떠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출처/ 문화재청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국보 제22)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 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 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 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 靑雲橋 백운교白雲橋(국보 제23)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4계단으로 되어 있는 위로는 16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로는 18단의 백운교가 있다.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이는 반원 아치 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국보 제26)

불국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높이 1.77m의 이 불상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작은 소라 모양으로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 주름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 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출처/ 문화재청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높이 1.66m의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 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신체 표현은 장중하여 건장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키며, 두 무릎은 넓게 퍼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거침없는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양감 있는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 등에서 사실적이면서 세련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출처/ 문화재청

관람(입장)시간

주중 오전 9~ 오후 6

주말 및 공휴일 오전 8~오후 6

*매표마감 6, 퇴장시간 7. *연중무휴. *반려동물 입장 불가.

문화재 관람료

성인 Adult(19~69세 Age) 개인(individual) 6,000

중. 고등학생 Youth Uniformed (만13~18세 Age) 개인(individual) 4,000

초등학생 Child(만 7~12세 Age) 개인(individual) 3,000

가볼만한 곳 경주

보문단지 :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된 보문단지는 역사여행지가 아닌 관광휴양지다.

호텔, 콘도 등 다양한 숙소와 경주월드, 엑스포공원 등 놀이시설이 있어 즐거움을 추 구하는 가족여행지에서 인기가 높다.

신라밀레니엄파크 : 역사공부와 놀이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역사체험 놀이동산, 신라시대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귀족마을 천년고도에서는 신분에 따른 가옥의 규모와 특징 및 생활도구를 체험할 수 있다.

감은사지 : 신라 31대 신문왕이 681년 문무왕의 뜻을 이어 해안가에 창건한 사찰.

괘릉: 신라의 왕릉 중에서도 가장 볼거리가 많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능묘 제도를 가장 완벽하 게 보여준다. 능의 주인은 제38대 원성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무왕릉 : 감포 앞바다 바위섬에 조성된 수중릉, 대왕암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하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중 왕릉이다. 육지에서 약 200m 떨어져 있으며 바위섬 가운데에 십자로 수로가 나 있는 곳이 화장한 유골을 봉안한 납골처로 여겨진다. 무덤의 주인은 신라 제30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6년에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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