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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 들어선 왕가의 기품 창덕궁

역사학/국내여행

by 가을향기쉼터 2022. 9. 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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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 들어선 왕가의 기품 창덕궁

둥재시기: 199712

등재이유: 1.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궐이다

2.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이궁이다.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정궁이긴 했지만 그리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 2대 정종이 즉위하면서 개경으로 도읍을 옮겨 궁을 비우게 되었고 제3대 태종때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새로이 창덕궁을 지어 기거했다.

경복궁을 대신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했다.

정궁: 정궁은 왕과 왕비가 사는곳. 육궁이라 해서 왕의 침전(정궁),왕비의 침전(중궁)왕세자의 침전(용궁)대비의 침전(서궁)후궁 및 세자빈의 침전(빈궁)등이 다 갖춰져야 한다. 경복궁이 이에 해당하고, 이궁은 정궁을 사용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궁이다. 창덕궁은 이궁이기 때문에 육궁을 다 갖추지 않았고, 이외에 서울을 떠났을 때 잠시 머무는 행궁이 있다.

tips.궁궐과 궁은 다르다

왕이 나라일을 살피던 정전. 법전.편전 등을 비롯해 대신들이 모여 정사를 의논하던 장소, 궁을 지키는 군사가 머물던 건물 등이 모여 있는 일곽을 외전이라고 하고, 궐은 외전이 수행하는 기능을 말한다. 외전의 상대적인 공간이 내전이다. 왕과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이를 궁이라고 한다. 궁궐이라고 하면 외전과 내전이 모두 있는곳을 말한다.

돈화문 모불 제383

창덕궁의 정문, 태종12(1412)세워진뒤 이듬해 태종의 공덕을 새긴 15000근의 동종을 달았다. 원래는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양식을 택해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을 달고 그위에 이충으로 올린 건물이었다. 흥예문이 셋이 열린 육축 위에 세운 경북궁의 광화문과는 달리 화강암을 바닥에 깔고 이층의 문루를 올렸다. 이궁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풍기고자 함이었다.

희정당 보물 제815

본래 왕의 침전이나 판전의 역할을 하면서 평상시 왕이 정사를 보았다. 중앙의 정면9,측면3칸을 거실로 사용했다. 이중 정면 3칸은 응접실로 하되 서쪽에는 희의실을 꾸몄다. 1920년대에 재견하면서 서양식을 가미해 바닥마루, 유리창문, 휘장, 양식탁자등을 설치했다. 현재 응접실의 양쪽에는 김규진의(금강신도)(해금강도)가 걸려있다.

인정전 국보제225

창덕궁의 정전으로 격식과 의장이 잘 갖추어져 있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식, 외국 사신 접견식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이중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집인데, 내부는 아래위층이 트여있어 웅장미를 더한다.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된다. 구한말 격변기 때는 서양식 쪽나무와 들어서 올리는 창, 전기시설등을 설치하기도 했다.

인정문 보물 제813

인정전의대문. 태종5(1405)창덕궁 창건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뒤 광행군이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다. 영조20(1744)아웃한 승정원과 함께 불에 탔는데, 이듬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조전 보물 제816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왕과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수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 1917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지었다. 이때 창경궁에 맞도록 내부 구조가 바뀌었다.

선정전 보물 제814

왕이 신하들과 만나 정사를 의논하던 창덕궁의 편전이다. 왕이 건물 중앙에 일월오약도를 배경으로 앉고, 그 앞에 대소신료들이 위계에 따라 동서로 벌려 앉았다. 동쪽엔 문관이, 서쪽엔 무관들이 자리 잡는다.

낙선재

24대 현종이 경빈 김씨와 지낼 새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소박한 주택풍의 외관으로 지어져으며, 단청도 하지 않은게 특징이다. 1926년 순종이 죽은 뒤 윤비가 이곳에서 은거하다 죽었고,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연경당

후원안에 지어진 유일한 민가 형식의 건물. 연경당이라는 당호를 지닌 사랑채, 안채, 안행랑채, 서재, 후원, 정자, 연못등이 고루 가추어져 있다. 이른바 99칸 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실제크기는 109칸이나 되는 대저택이다.

후원

창덕궁의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궁궐의 정원, 창덕궁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다. 자연스레 흐르는 계곡에는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만들어 아름답게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북원,금원, 후원이라 불렀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겪을 깎아 내리려고 비원이라 불렀다.

가볼만한곳 :서울

경복궁: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 겨울에 착공해 이듬해 9월 준공한 정궁이다

창경궁: 성종 15년(1483)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궁궐이다.

덕수궁:덕수궁의 자리는 태조의 계비인 강씨의 무덤인 정릉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졌는데, 그 자리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집을 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을 맞아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보니 거처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 거처로 삼고 정릉동행궁이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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