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고분의 집합소 대능원지구
1. 등재시기 2000년 12월
2. 등재이유 :신라왕,왕비,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발굴 조사에서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등 당시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 출토가 되었다.
대릉원은 경주를 찾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리는 장소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천마총이 있다. 155호분이라 불리다가 천마를 그린 장니가 발견돼 천마총이라 부른다.
천마총은 경주에서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왕릉이다. 유물이 출토된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해 놓고, 천마총에서 발굴된 유물이 무엇인지 알수 있도록 전시실도 마련했다. 천마도, 금관 등 진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전시 중이고,, 천마총 내부의 것은 모조품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특유의 무덤이다. 돌무지는 돌 더미, 덧널은 곽(널을 넣기 위해 따로 짜 맞춘 매장시설)을 말한다. 널은 시신을 넣는 관이나 곽 따위를 통틀어 말한다.
1973년 4월6일 천마총 발굴은 황남대총 발굴을 위한 시험용이었다. 연습삼아 시작한 발굴에서 생각지도 못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덧널 안에서는 피장자가 차고 있던 금과, 금제과대, 요패, 팔찌,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환두대도가 발견됐다. 껴묻거리함 뚜껑 위에서는 금제 조익형 관식과 금제접형관식 및 금동모, 금동제경갑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발견은 가로 75cm,75cm, 세로 56cm, 두께 0.6cm의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겹쳐 사격자로 누벼서 만든 천마도였다. 말 옆구리에 진흙 같은 것이 튀지 않도록 달아매는 다래에 얇은 가죽단을 돌려, 상단중앙은 반달형으로 팠고, 중앙에 하늘을 나는 백마를 그렸다.
천마도와 함께 크고 화려한 금관도 출토됐다. 높이 32.5cm의 금관은 세 개의 출(出) 자형 입식과(出) 양 끝에 녹각형 입식을 세운 일반적인 형식의 신라 금관이다.
당시 조사단의 일원으로 발굴에 참여한 전 문화재연구소장을 지낸 조유전 박사는 (발굴이야기)(발굴 이야기)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7.26일 오전 드디어 14:00~1500년의 깊은 잠을 깨고 신라 금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고 쾌청하던 하늘에 갑자기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이에 놀란 작업 인부들과 조사원들은 일손을 놓고 피신하기 바빴다. 잔뜩 겁먹은 심정으로 일단 피했다가 다시 금관을 수습하여 세척한 후 준비된 상자에 안전하게 옮겨놓자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맑게 개었다.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신라 왕의 넋이 크게 노했나 보다고 발굴단원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그렇게 느낄 만한 기상변화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 황남대총
천마총 입구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보면 연못이 있고, 연못 너머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는 커다란 무덤이 보인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무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이다. 황남대총이란 경주 황남동에 있는 커다란 무덤이란 뜻이다.
황남대총은 낙타 등처럼 두 개의 봉분이 굴곡져 있다. 하나의 무덤이 아니라 두 개의 무덤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남쪽의 무덤은 왕, 북쪽의 무덤은 왕비의 것으로 밝혀졌다.
두 무덤 모두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주택과 어우러진 노동리 고분군과 노서리 고분군
대릉원 후문을 나오면 사거리 양편으로 두 개의 고분군이 있다. 왼편의 것이 노서리고분군이고, 오른편의 것이 노동리 고분군이다.. 경주의 고분들 중에서 사람들과 가장 인접해서 어우러져 있는 고분이 두 고분군일 것이다. 두고분의 특징은 어렵고 까탈스러운 존재가 아닌 편하고 친숙한 친구 같다..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인데, 고분이 있는 공원이라는게 다른 점이다..
경주를 여행하며 받는 첫인상은 고분이 많이 보인다. 길을 걷다 보면 길가에도 커다란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심지어는 주택가 한가운데에도 무덤이 봉긋하게 올라와있다. 아마도 경주를 역사도시로 보여지게 하는 것이 고분이 아닌가 싶다.
천년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과 오늘날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한 곳에 있기에 경주의 신비함과 역사적 가치는 더욱 빛난다고 볼 수 있다. 경주의 고분들은 평지에, 왕궁인 월성에 가까이 조성되었고, 월성 주변인 황오동,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신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왕은 일반 백성에 비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신민 의식도 가지고 있어 살아 있거나 죽어서나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던 듯하고, 죽어서까지도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백성들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라의 왕들은 경주 도심에 선왕의 무덤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백성으로 하여금 존경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무덤, 오릉
경주시내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가는 길목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능으로 알려진 오름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와 일영왕후, 제2대 남해차차웅, 제3대,제3 우리 이사금,, 제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능은 원형봉토분으로 남쪽에 있는 11 호능이 가장 높고 크다. 2호 능은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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