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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절터 황룡사지구

역사학/국내여행

by 가을향기쉼터 2022. 9. 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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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절터 황룡사지구

 

등재시기:2000년 12

등재이유:황룡사 구층 목탑 등 발굴을 통해 신라시대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출토된 4만여점의 유물은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이다.

경주의 수많은 절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아무다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황룡사가 아니었을까. 왕궁인 월성에서도 가깝고 2만여평이 넘는 규모에 엄청난 크기의 목탑과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도 황룡사의 존재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황룡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논 가운데 절터와 구층 목탑과 건물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자리에 돌들만 남아 있다. 흔적만으로 웅장했을 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신라의 왕은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강당에 친행 해100명의 고승이 모여 강하는 백고좌강회를 열어 불보살의 가호를 빌기도 했다. 본래 황룡사 자리는 궁궐을 지으려던 땅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제24대 진흥왕 14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왕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궁궐을 절로 고쳐 황룡사라 하고 1년 후인 569년에 담을 쌓아 완공하였다. 그러나 황룡사가 온전하게 제모습을 갖춘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진흥왕 35년(574) 본존불인 금동장륙상이 조성되었다. 구층목탑이 세워진 것은 제27대 선덕여왕 14(656)의 일이다. 이처럼 황룡사는 진흥왕에서 진지왕,진평왕을 거쳐 선덕여왕에 이르기까지 4대왕 9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지어진 큰 절이다.

지금 황룡사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과 불탑, 불상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다. 이를 토대로 황룡사의 구조를 살펴보면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형식인 일탑식임을 알 수 있다.

신라석탑의 시작, 분황사 모전석탑

황룡사 북쪽으로 접해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창건되었다. 전불 시대 철처가람터의 하나로 성스럽게 여겨졌다. 황룡사가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위한 절인 반면 분황사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절이다. 분황사를 대표하는 것은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신라의 불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한 일반적인 불탑과는 재료도, 모양새도 사뭇 다르다. 마치 건축물처럼 육중해서 불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특별함을 지녔다.

기단을 단층으로 하고 그 위 네 모서리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했다. 초층탑신 4면에 감 실을 파고 화강암으로 돌문을 달았다. 돌문에는 입체감이 돋보이는 인왕상을 새겼다. 분황사모전석탑의 “모전이란 벽돌을 모방하다는 의미로,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불탑이다. 돌을 자르고 다듬어 건물을 짓듯 하나하나 올렸으니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분황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원효다. 원효가 화엄경 60권을 10권으로 해석한 화엄경소, 신라의 호국 경전 중 하나인 금광 명경을 해설한 금광 명경 소 등 방대한 불서를 저술한 장소가 분황사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원효가 죽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원효의 유해와 진흙을 섞어 소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분황사에 안치해 공경하고 사모 하는 마음을 다했다. 어느 날 설총이 정면이 아닌 옆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설총을 보았다고 한다. 소상은 일연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까지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Tips 신라삼보

신라삼보란 호국을 상징하는 국가적인 보물인 황룡사 장륙상, 황룡사 구층탑, 천사옥대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천사옥대는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뒤 상황이 보낸 천사에게 전해 받은 옥대라고 적혀 있다. 진평왕은 하늘과 땅에 제사 지낼 때와 종모에 제사 지낼 때 반드시 옥대를 허리에 둘러 왕의 신성성과 권위를 나타냈다.

출처 가람터

월성에 있던 7군데의 전불 시대 절터,, 전불 시대는 석가모니 이전에 세상에 출현했다는 일곱 부처의 시대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칠지 가람터는 불법이 길이 유행하던 땅이다. 일곱 개의 절터는 금교 동쪽 천경림(홍륜사) 삼천기(영흥사), 용궁의 남쪽(황룡사), 용궁의 복쪽(분황사) 사천의 끝(영묘사), 신유림(천왕사), 서청전(담엄사)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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