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조선왕릉

역사학

by 가을향기쉼터 2022. 9. 13. 23:21

본문

반응형

조선 500년 역사가 숨 쉬는 공간 조선왕릉

등재 시기 2009년 6월30일

등재 이유 : 풍수지리 사상을. 봉분과 조각,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탁월한 사례로 동아시아 묘제의 중요한 발전단계를 보여준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 제례의식을 거행하면서 살아 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대개 왕릉은 풍수가 좋은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명당은 모두 서울 근교에 모여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간단하다. 왕실의 능역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10리 밖에서 100리 안에 두도록 하는 법이 존재했다. 100리라면 경복궁에서 수원 정도의 거리다. 예외가 있다면 단종의 능인 장릉이다.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를 떠난 뒤 그곳에서 사약을 받아 죽었거,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옮기면 삼족을 멸하겠다 “고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죽어서도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다. 조선왕릉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이중 제1대의 태조의 비 신의왕후 제릉과 제2대 정종의 후릉 등 2기가 북한에 있다. 왕에서 폐위된 제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의 무덤은 왕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이 승하하면 국장을 담당할 임시기구인 도감이 설치된다. 보통 3개월에서 5개월에 이르는 국장 기간 동안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 등 세기관에서 제사와 장례, 왕릉 택지 선정에서 축조까지 나누어 담당한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안치한 빈소의 제사와 호위를 담당한다. 필요한 수의와 홑이불 등 각종 물품들을 준비한다. 1명의 당산관과 1명의 당하관으로 구성된다. 국장도감은 왕의 장례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관과 상여 등에 해당되는 재궁, 거여 그리고 부장품들을 준비한다. 주요 임무는 무엇보다도 궁궐에서 왕릉까지 이르는 발인 행렬을 책임진다. 구성 직책으로 예조판서와 호조판서, 기술관리청인 선공감과 네 명의 당하관에 기술직 관원을 두었다. 왕의 유해는 무덤에 안장될 때까지 영침에 누워 통상 3개월에서 5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왕릉의 생기를 받기 전에 유해가 부패되어서는 안 되기에 선공감은 공조의 주관으로 유해 보관장치를 만든다. 그것을 설빙이라 하였다. 설빙은 빈소로 사용하는 방 가운데에 대나무 평상과 대나무 그물을 짜 유해를 모셔 놓고 동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주위를 둘러쌓는 것이다. 이때 습기가 유해해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습기를 잘 빨아들이는 미역을 사용했다. 수개월의 국장 기간 동안 교체된 미역은 산더미를 이루었고, 처분되어야 할 미역이 암암리 시중에서 싼값으로 팔렸기에 국상 중 미역값이라는 속담을 낳기도 했다. 산릉도감은 왕릉 현장에서 토목공사, 석물 조성과 건축물 조영 등 가장 힘든 역사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공조판서, 선공감, 당하관 2명 및 여러 멍의 기술직 관원들로 열 명 안팎이 있었다. 실제 현장에서 부역하는 인원은 건원릉의 경우 한 달 이상 6000명이 동원되었다. 국장 진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왕릉의 택지다. 새롭게 왕위를 이을 왕은 부왕의 죽음 앞에 예를 다하는게 도리였다. 따라서 최고의 길지에다 능을 조성해야 했다. 이는 효의 윤리이기도 했지만 국가의 번영과도 관련 깊은 것이라 여겼다. 능지는 미리 정해 놓는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그때마다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을 보내 최고의 명당을 찾도록 했다. 승하한 날로부터 통상 보름이 지나면 왕릉 택지를 보러 다녔다. 풍수지관들과 함께 대신들이 한양 주변 백리 안팎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풍수가 좋다고 천거된 후보지는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재위 왕의 결정으로 정해졌다. 능 자리로 택지 된 곳은 풍수설에서 말하는 명당이다. 명당이란 큰 산과 물이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지맥이 흐르다가 멈춘 곳이다. 북쪽에 내룡이라 하여 주산이 있고, 주산에서 좌우로 청룡,백호가 뻗어 있다. 묘역 안에 시내가 흐르되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이면 더욱 좋다. 묏자리 앞으로 안산이라 하여 낮고 작은 산과 더 먼 곳에 그보다 높은 조산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명당에 지맥이 닿아 생기가 집중되는 곳을 혈이라고 하는데, 이 혈이 최고의 묏자리인 것이다. 풍수에 의하면 이런 곳이라야 시신이 직접 당에 접하여 생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명당을 선택하면 마지막으로 토질 검사를 거친다. 관이 들어설 땅은 물기가 없으면서도 너무 건조하지 않아야 한다. 흙의 입자가 곱고 윤이나야 이상적이다. 이 같은 까다로운 조건이 만족되어야 비로소 왕의 무덤 자리로 손색이 없는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이미 조성한 능리라도 새로운 풍수설이 등장해 불길하다 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는 서삼릉 내에 장경왕후와 함께 모셔졌던 중중의 능을 풍수상의 이유를 들어 선릉 옆으로 옮기고 자신이 그 곁에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새로운 능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이면 흙을 다시 쌓아야 하는 일이 발생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 공릉동에 안장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왕릉을 옮기자는 신하들의 상소가 보인다. 왕릉을 옮긴 대표적인 예는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 씨의 합장릉인 영릉이다. 영릉은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 대모산 기슭에 있다가 예종 원년(1469)에 지금의 여주로 옮겨졌다. 왜 세종대왕의 무덤을 옮기려 했을까, 처음 대모산 자락에 장례를 지낸 뒤로 문종의 재위가 짧았고,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대신들은 이 모두가 대모산의 자세가 불길한 탓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여주로 옮겼는데 여주의 왕릉은 조선의 왕릉 중 풍수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