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의 형식
조선시대에는 모두 44기의 왕릉의 조성되었다. 500년 동안 조성된 왕릉은 저마다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기본적인 능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능역에 들어가자면 작은 내를 건너야 한다. 이는 궁궐의 정전에 들어갈 때 정전의 정문과 궁궐 대문 사이를 흐르게 한 명당수의 개울을 건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능역 입구에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서 있고, 그 뒤로 정자각까지 얇고 넓적한 돌을 길게 깔았다. 이를 참도라고 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흙을 밟지 않는 임금에 대한 예우의 뜻이 담겨 있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 벽돌을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깐 판위가 있다. 왕이 선왕의 제사를 지내러 올 때 바로 이곳에서 절을 하고 들어갔다. 참도를 따라 올라가면 전면에 정(丁)자모양을 하고 있는 정자각이 서 있다. 이곳에서 제례를 올리게 된다. 정자각으로 오를 때는 반드시 동쪽 계단으로 올라갔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는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정자각 좌측의 비각은 왕릉의 묘비를 안치하기 위한 조성물이다. 비각 앞쪽에는 능제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을 준비하는 수복방이, 정자각 우측 뒤쪽에는 축문을 태워 묻는 예감이 있다. 정자각 뒤쪽으로는 작은 동산 모양을 흙 더미로 조성한 강이 있는데 그 강은 조선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풍수상 땅속을 흐르는 생기는 흙을 몸으로 삼는다. 강을 조성하는 이유는 생기가 모이는 저장탱크 위에 왕릉이 있어야 생기를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풍수지리적 믿음 때문에서다. 또한 일반 무덤과 차별되도록 높은 강을 권자로 삼아 등극한 왕릉을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를 준 것이기도 하다. 강을 사초지라고도 부르며, 사초지 위에 오르면 장대석이라 부르는 긴 돌이 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놓여 있다.
무덤 앞쪽으로는 섬돌처럼 장대석을 3단 형식으로 쌓았다. 첫 단 공간에는 석마와 무인석, 둘째 단 공간에는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서로 마주 보도록 세워졌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 특성상 무인석보다 문인석을 한 단 더 높은 장대석 위에 매김질시켜 놓았다. 문인석 사이 한가운데에 팔각형으로 된 석등인 장명 등을 앉혔다. 마지막 단에는 봉분 바로 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 그 좌우로 망주석이 세워졌다. 봉문 밑부분에는 12각이 병풍석을 둘러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또다시 난간석을 두르고, 석양과 석호 두 쌍을 각각 좌우로 벌려 놓았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의 뜻을 갖고, 석양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 다만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추존 왕릉은 한 쌍으로 줄여 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그리고 봉분 주위로는 능을 감싸듯 앞면만 터 놓은 담당, 즉 곡장을 돌렸다. 왕릉은 배치상으로 볼 때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왕이나 왕비 어느 한쪽만을 매장한 단릉, 둘째 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소구릉에 나란히 배치한 상릉. 셋째 정자각 좌우로 두 개의 소구릉에 각기 1능씩 두는 형식, 넷째, 부부를 같은 봉토에 합장하는 형식 등이다
27명이나 되는 조선 왕의 계보는 우리가 부르는 조와 종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이런 명칭은 정작 왕 본인이 살아생전에 불린 적이 없고 죽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조,태종,성종,선조 등의 이름은 임금이 죽은 후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이름으로 이를 묘호라 했다. 묘호는 재위 시의 행적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추모의 뜻을 담고 있는데, 어떤 이름에게는 조를 붙이고, 어떤 임금에게는 종을 붙였는데, 조와 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살펴보면 역대 27명의 왕 중 조가 붙은 임금은 7명, 종이 붙은 임금은 18명이다. 조, 종을 달리 붙인 것은 중국의 경서(예기)에따른 것인데,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 일반적으로 왕으로 있는 동안 외적의 침입과 국내의 큰 난을 당했지만 이를 잘 극복한 왕에게는 조를 붙였다. 반면 나라 안팎으로 태평성대를 누린 왕이나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종을 붙였다. 태조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초대 왕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고, 세조는 계유정란으로 조카인 단종의 행위를 빼앗았지만 쇠약했던 왕권을 회복해서 조자 묘호를 받았다.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에서 왕조의 정통성이 끊어지지 않도록 위를 극복해서 조자의 묘호를 받았고, 반면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종자가 붙은 임금도 있다. 종중은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고, 왕조를 다시 중흥시킨 공을 세웠다. 따라서 그의 아들 인종은 즉위 초에 아바저의 묘호를 조로 칭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선왕이 비록 중흥의 공이 있기는 하나 성종의 지기 계로 왕위를 계상하였으므로 조로 하기보다는 종이 마땅하다”라고 반대하여 중종으로 칭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조와 종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왕들의 의식 속에 종보다 조가 격이 높다는 선입견이 자리하게 돼 종으로 조로 뒤바뀐 경우가 몇차례 있다. 제14대 선조도 당초에는 묘호를 선종이라 칭하였는데, 광해군 8년에 선조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조나 종은 하등 좋고 나쁜 차이가 없는 것이니 본래 도로 선종으로 복귀시킴이 옳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들은 조와 종에는 품격의 차이가 있다고 믿었고, 선조 외에는 영조, 정조, 순조,정조, 등도 처음에는 종의 묘호가 붙었다가 후대의 왕들이 다시 조로 바꾸었다. 임금 중에는 조나 종의 묘호를 받지 못하고 군으로 불린 경우도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에 의해 축출됨으로써 왕자에게나 붙이는 ‘군’의 칭호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후대로부터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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