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이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 비유해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가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려는 의도로 지어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국찰이 되어 해동제일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이 심할 때는 전국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두기도 했었는데, 해인사는 18개 교종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고려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사찰이자 조계종의 종합 수도 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애장왕3년순응이 불사를 일으키고 이정이 완공했다.
해인사는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이다 삼보란 3개의 보석이라는 뜻이다. 3 귀의처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 삼보는 부처, 부처의 말씀,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자 집단인 승가로 이루어진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모시고 있는 법보사찰이다. 법은 곧 해인사의 사격을 상징하는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국보제52호)고려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 조선 태조 7년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올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건축된 지 600년이 훨씬 지났어도 건물 자체의 기둥 하나 기울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경판의 진열, 통풍, 방습, 인경 작업의 편의 등을 완벽하게 고려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건립되어 고려대장경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등재 시기 1996년 12월 3. 등재 이유: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이 완벽하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볼 수 있는 세계 불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다. 5세기경에 건축된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방지와 온전한 보관을 위해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의 소산물로 높이 평가된다.
고난 극복을 위해 탄생한 문화적 산물이다. 고려 현종 2년1월 거란이 침입하자 왕은 나주로 피난해 국력과 민심을 모아 대장경 편을 새겼고, 불경을 기록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고 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1076분 5048본의 초조대장경이다. 36년 후인 문종 1년 초간본에서 빠진 1000여 권의 불경을 보완해 고려 속장경이 간행되었고, 숙종 1년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요, 송, 일본 등지에서 가져온 경서를 모아 1010부 4740권의 (신편제 종교 장총 록)을 간행하였다. 이를 흉 왕사 교장도감에서 새긴 것이 고려 속장 경판이다.
해인사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서 있는 장경판전은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평범한 건물이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계산을 통해 자연의 변화를 계산한 조상들의 지혜와 솜씨가 담겨있다. 조선 태조 7년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올 때 창견한 것을 추정된다. 장경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로 지어진 두동의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놓여있다. 남쪽의 건물인 수다라장과 북쪽의 건물인 법보전은 고려대장경을 보관하는 곳으로 가각 정면 15칸, 측면 2칸이다. 두건 물 양쪽 끝에 사간판을 보관하고 있는 사 간고가 있다. 눈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건물에 지나지 않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것은 고려대장경의 보관기술 때문이다.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32호) 고려 고종 19년 몽고의 침략으로 이전에 간행되었던 초조대장경 등이 모두 불에타 사라지자 1236년부터 16년의 기간 동안 새롭게 간행된 대장경. 경판의 장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8만 4000 법문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판은 평균 길이 24cm, 너비 70cm, 두께 2.8cm이며, 각 판마다 아래위로 경계선을 마련하고 한 행에 14자씩 한 면에 23행, 양면으로 모두 644자의 글씨를 새겼다.
각 경판은 평균 길이 24cm, 너비 70cm, 두께 2.8cm, 무게 3.25kg이다. 글자를 쓴 판면은 평균 길이 22cm, 너비 54cm이다. 각 판마다 아래위로 경계선을 마련하고 한 행에 14자씩 한 면에 23행, 양면으로 모두 644자의 글씨를 새겼다. 경판의 뒷면에는 불경의 이름과 권차, 장차, 천자문 순서대로 함호를 새기고 좌우 마루리에도 동일한 표시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대장경은 현재 8만 1258판 1511부 6802권에 이르며 해인사 장경판전에 봉안되어있다. 고려대장경과 관련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연 전란 중에 강화도에 대장경판을 제작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주에 분사를 둔 점이나 남쪽 지방의 산벚나무 등을 재료로 한 점을 들어 강화도가 아닌 남부지방에서 제작되었고, 후에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학계의 설은 강화 도성 서문밖에 있던 대장경판당에서 보관하다가 강화도 내 선원사로 옮겨졌고, 다시 조선 태조 7년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려대장경의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경판전의 역할이 크다. 고려대장경이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제대로 보관되어 전해질수 있었던 이유가 장경판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의 다른 이름은 현재 동양에 남아있는 20여 종의 대장경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000 법문을 수록하였다 해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 대장경판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뒤 다시 대장경을 새겼다해서 제조 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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